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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한석봉의 삶과 사후

by 삶은개발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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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543년 11월 15일에 아버지 한언공과 어버니 백인당 백씨 사이에서 아들로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한호였고 호는 석봉이라는 이름을 썼다. 한호가 태어난 후에 한 점술가가 이런 말을 남겼었는데, 옥토끼가 동방에서 태어났으니, 낙양의 종이가격이 높아지겠다고 하며 훗날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해질 것이다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생전에 관직이 없었고, 사후에 한호가 원종공신에 녹훈된 공로로 인하여 증 호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한호가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보내면서 조부에게 글을 배웠지만 조부마저도 15살에 돌아가시게 된다. 그 후로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한호는 어렸을 때 꿈에서 왕희지에게 글씨를 선물받는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또 똑같이 꿈에서 왕희지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필법을 전수해주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고 전해진다. 그 것을 계기로 계속해서 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2살에 영계 신희남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한호에 재능을 알아보게 되면서 신희남은 자신의 스승인 청송 성수침, 휴암 백인걸에게 추천을 하게 되고, 그들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면서 20살까지 글과 성리학 학문을 배우고 깨우쳤다고 한다. 한호는 인척인 최립과 가까이 지냈었는데 그와 주고받았던 글과 편지 시 등이 일부 실려 있다. 그는 사람이 중후하면서 술을 잘 마셨다고 전해진다.
이정귀가 말하기를 한호는 술을 마시게 되면 도도한 주흥에 겨워 자적하면서 시를 읊었고, 글씨를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품 자체로 너그러우면서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적었고 또 남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버럭 화를 내진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말로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567년 25살 때 식년과 진사시에서 3등으로 합격하게 되고 1583년에 와서별제,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게 되고, 통례원 인의, 북부 사도, 사포서사포, 사재감 주부, 한성부 판관, 종친부 전부 등을 역임하게 된다.
한호는 특히나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미암 유희춘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572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원접사 임당 정유길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건너가명서 1582년에 귀국 후 율곡 이이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다시 수행원으로 선발되면서 명나라 연경을 다녀오게 된다.
1591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의 원접사의 사자관으로 임명되면서 이들을 접견하게 된다. 그리고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어가가 의주로 파천될 때 광국원종공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때 그는 사보로 왕의 행재소에 가면서 문서관계의 일을 맡았고, 그 해에 8월 때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고 한다.
정랑으로 재직 중에 1593년 명나라에 주청사로 파견되는 최립의 수행원이 되면서 또 명나라 연경을 방문했고 다음해 초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한호는 사자관으로서 국가 주요 문서 및 외교 문서를 도맡아서 작성하였다고 전해지고, 그 동안 사신을 따라다니면서 몇 차례 명나라로 다녀왔다고 한다.
사신을 따라다니면서 명나라에 갈 때마다 한호는 연석이 벌어진 자리에서 특유의 정교한 필법으로 글씨를 썼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동방 최고의 명필이라고 소문을 내면서 아낌 없는 칭송을 들었었는데 거기서 명나라의 여러 고위 관료들로부터 왕희지와 비교하는 평판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공조와 형조의 현판인 대성전의 판액을 쓰기도 하였다.
선조는 한호가 쓴 글씨를 보며 감탄하였고 그의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였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 마귀 등도 한호의 글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만나 친필을 부탁하면서 얻어가지고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1601년에 차역과 세금 징수로 인한 일들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지만 선조의 추고로 인하여 무마되었다.

그렇게 1604년에 공신 녹권을 필사할 때 한성부로 소환하여 녹권 필사를 맡겼지만 싫어하는 기색을 내며 고의로 글씨를 막 썼다고 전해져서 사헌부의 탄핵을 또 받으면서 결국 파직하게 되고, 1605년 7월 1일에 사망하게 된다.

사후

이덕형의 수필집이였던 중창한화에 의하면 한호의 글씨는 아무래도 조선시대에서 엄청 유명하였고, 임금마저도 감탄하게 만들정도로 파급력이 강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글씨를 탐내는 이들이 많았었고, 항상 한호의 아들이나 형제들 중에서 한호의 필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면 항상 타인에게 빼앗겼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황해도 금천군 안신리 현재 기준으로 황해북도 토산군 석봉리 석봉산 해좌원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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