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천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에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하게 된 동창생은 27명이었으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끝이다.
왜냐하면 당시 4%만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공부를 잘했지만 공부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하던 농사도 하기 싫어했고 상대적으로 보면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편이었지만 국가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몇차레 가출을 반복하면서 실패를 반복하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게 된다.
가출한 후에는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서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서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나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고,
금화에 가서 일했을 때는 두 번째 가출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를 판 돈 70월을 들고 세 번째 가출을 한 후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히게 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933년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면서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네 번째 가출을 마무리 했다.
정주영은 배달일을 하면서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그렇게 가게를 물려 받으면서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지만 개업 후 2년 후에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폐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하게 된다.
해방 후인 1946년에 미군 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이었던 200평을 불하받으면서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고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하였고,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했다고 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
또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는데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게 밀리게 되면서 3위로 석패하게 된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면서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그렇게 2000년도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면서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면서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그 후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면서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8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