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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삶과 사후

by 삶은개발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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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장보고는 출생일과 출생장소 등에 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비록 출신지가 명확하지 않지만 장보고의 친구였던 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그가 바다와 밀접한 장소에서 태어났을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친구였던 정연이 당나라에서 굶주림으로 인해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고싶다고 하여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에 장보고를 만나러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거의 완도 출신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본명이 장보고가 아닌 궁복 또는 궁파였는데 한국 고유어식으로 읽으면 활보로 읽는다.
그의 이름 자체에서 궁이라는 단어가 활이랑 관련이 있어보이는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의 추측으로는 가문이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골품은 수도인 경주 사람들만 대상하기 때문에 골품의 질서 안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친구였던 정연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서 군인으로 입대를 하여 거기서 승마와 창술을 배우다가 이에 대해 특출난 재주를 발견을 했으며 이를 통해서 무령군중소장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초에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고충을 겪고 있을때 장보고를 장군으로 선정하여 만명의 군대를 확보 한 후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활약 덕분에 827년부터 835년 사이로부터 해상에서 신라 백성들이 노예로 매매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또.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한 후 당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발해와 그 유럽 국가들까지도 확장 시켜 무역 활동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고 전해졌으며 그 덕분에 신라는 큰 세력을 얻었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그리고 장보고는 자기가 해상권을 장악하기 전에 신라 백성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들을 보아 직접 그 노예를 사서 신라의 백성들의 노예 생활을 해방시킬 수 있게 도와줬으며, 그들은 신라 출신의 이민자들이 건너갔던 산동 근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또,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하지 않음으로서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섭외해왔고, 자신의 진영을 환대하면서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해왔으며 그들의 능력들을 적극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된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사망한 후 신라에선 왕위 다툼이 벌어졌는데 김제륭에게 패한 후 거기서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왔을 때 오히려 쫒아내지 않고 그를 숨겨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근데 얼마안가서 김제륭도 사망하게 되자 김균정의 장군들이 군사를 모아서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난 후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에 동의하여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내주면서 같이 왕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승리를 한 후 그의 대한 보상으로 감의군사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받았다고 한다. 김우징(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으로 즉위했을 땐 진해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파견시키면서
삼각무역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장보고를 시기질투하던 귀족들과 신하들이 지속적으로 문성왕에게 저 장보고가 신라왕의 자리를 탐한다고 하며 경고를 했는데 결국 문성왕은 그들의 경고로 인해 불안함을 느껴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게 된다.

사후

삼국사기에서 보면 신라본기는 장보고가 사망한 연대가 문성왕 8년 즉 846년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속일본후기에서는 조와 7년 841년 11월 중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또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동시대의 기록에서도 보면 회창 5년 845년 7월에 전 청해진 병마사가 국난을 당한 후 중국에 망명했다는 기록들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장보고의 사망 기년이 841년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 삼국사기를 기재한 김부식은 신라본기와의 기사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장보고에 대한 두목과 송기의 평가를 지지한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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