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중섭은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특히 소를 많이 그렸으며 한국적인 미를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안악 이씨 사이에서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흰 소와 황소가 있다.
그가 5살이던 1920년에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가와 외가가 탁월한 부자였어가지고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커왔다고 전해진다.
1931년에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 임파 임용련에게 미술지도를 받게 된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파로서 그가 연설에서 이런 말을 남겼는데 조선인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말에 의해 이중섭은 깊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한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라는 평이 많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잘 보면 한켠에 'ㅈㅜㅇㅅㅓㅂ'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가 많다.
1935년에 제6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하게 되는데, 다만 논란거리가 하나 생겨난 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졸업앨범에 넣을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인하여 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순히 화가의 세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했었지만, 시대적으로도 논란이 될만한 이야기라서 하도 말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졸업앨범에 반영하기로 했던 것은 전격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4월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있던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했다고 전해진다.
1937년 4월에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에 입학한다.
이 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었으며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1944년 12월에 학교에서 만난 미술부 한 해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교제 후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오게 된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과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필 이 당시 총후 화가로 일한 흑역사가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그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고 그의 형인 이중석이 일부로 동생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1950년 6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부터 12월까지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고 전해졌다.
1952년엔 장인어른의 부고로 인해서 6월에 아내와 두 아들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되면서 그는 가족끼리의 사랑이 깊었기 때문에 이별을 원치 않았지만 장인어른이 남긴 유산으로 그녀와 두 아들들을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기면서 그들을 떠나보냈다고 전해진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 때부터 가족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재회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치명적인 사기를 당하게 된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였던 마영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그의 사기 행각에 의해 이중섭과 마사코의 재회에 대한 욕구를 이용해 그들에게 20만엔에 가까운 거액의 돈을 사기치게 되면서, 결국 20만엔이라는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도 20년 이상을 삯바느질을 해야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는 사건이다.
그렇게 1955년 7월에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데다 개인전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을 내자 상심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 자학 증세 등이 생기게 되면서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다가 결국 병이 악화되면서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치게 되면서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치게 된다.
이 처럼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 사후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면서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그들과 공통점이 있지만 고흐는 애초부터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면서 어린 시절에 빈궁하게 살아왔지만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에 돈이 많이 드는 일본 유학을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 출신있다.
하지만 북한이 건국되면서 조선미술건설본부 등에 활동하며 북에서 공산당 동맹에 임하게 되지만 6.25전쟁으로 인하여 피난을 오게 되면서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고 험한 시기를 헤쳐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쪼달리게 되자 영양실조, 간암으로 인해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마감되는 통에 가난하게 살았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