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1901년 8월 1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산방 서동문외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아버지 이진규와 밀양 손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그의 아버지 이진규는 농업을 계승하여, 중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또한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도 하고 있었으며, 당시 건축수요 증대로 인하여 자신이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 하지만 농업을 하던 아버지의 토지가 철도건설 계획지점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땅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기게 되면서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어지자 결국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거주했다.
1912년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청파동(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천도교 계열의 미션스쿨인 문창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가정 형편이 안좋아서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10살까지는 집에서 글씨를 배우고 어렵게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버지 이진규가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면서 방탕한 일상을 보낸 후로 가정 형편이 더욱더 안좋아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봉창은 중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결국 1915년 경성부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한 후 막노동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1917년 그는 월급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었고, 결국 상점 점원을 그만두면서 약사 무라타 시게가쓰가 경영하는 한강로 16번지 약국 점원이 되었다.
하지만 약국의 경영 악화로 인하여 결국 1918년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1918년 경기도 경성부 금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동) 용산역에서 철도청 용산철도국 소속의 만선철도 역무원 및 열차 운전 수습생등으로 일했다.
그가 철도청에서 일할 때부터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송급과 봉급, 상여금 등 모든 면에서 차별되었다.
비록 조선인과 일본인 직원에 대한 차별성과 부당한 대우에 관해서 처음에는 냉정한 자세로 임하였고, 지금 현실에 대해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가 늦게 들어온 일본인 직원이 자신보다 급여, 호봉 등을 더 받자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1919년 4월 14일에 그만두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진심으로 일본인처럼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일본어 공부도 하면서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연습도 하며 노력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거의 큰 관심이 없었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이후에 일본인 행세를 하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했다. 하지만 한국식 이름을 계속해서 썼었고, 오사카의 가스회사에 취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름을 썼다가 같은 직장 동료가 발음하기 불편하다는 것에 의해 일본식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그러다 각기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봉창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자 그만두게 되었다.
1928년 그는 천황의 얼굴이 너무 궁금했었기에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교토로 갔다가 한문과 한글이 적힌 편지가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투옥되고 11일만에 풀려났다.
그는 투옥소 안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즉위식에 갔었는데 이런한 차별대우에 대해 깊이 회의감을 느끼며 그동안 조선인으로써 받은 차별에 분노하게 되었고, 1931년 1월에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 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달 받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이봉창은 일본인으로서의 행동들이 몸에서 배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많이 경계하였고,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로 여겼다.
다행히도 김구가 유일하게 이봉창을 믿어줘서 여러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1931년 12월 13일에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김구가 자신을 향해 슬퍼하자 그는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1932년 1월 8일에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며 수류탄 1개를 투척했는데, 천황은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하였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30일에 이봉창을 대역죄인으로 취급하고 사형을 선고했으며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이봉창의 활약 이후
비록 그의 거사가 실패하였지만 그의 후배인 윤봉길이 뒤를 이어 1차 거사에 실패 후 2차 거사때 성공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임정에 대한 한인 교민단체 지원을 이끌어내는데에 성공하게 된다.
광복 후 김구는 이봉창의 유해를 돌려받고 1946년에 효창공원으로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된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되면서 비록 그의 폭탄 투척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고,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함으로서 한국독립에 대한 열망과 강인성,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이 전 세계를 알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어서 임명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