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에 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야주현계 현재의 기준에서 봤을 땐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무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룡의 아들인 아버지 방경수와 어머니 손셩녀의 장남으로 태어나게 된다.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의 후선이었으며 순조때 구례현감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 장군의 동생이었던 방우준의 5대손이다.
아무래도 조부 대부터 상당한 부잣집의 손자로 태어나게 되면서 집은 큰 기와집 한 채도 부족해서 두 집을 사서 이어 붙여 만들정도로 부유했으며, 친구들에게 간식들을 아낌없이 나눠줌에 있어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았었고, 그 덕에 방정환은 골목대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방정환이 들른 가게 주인들은 항상 방정환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곤 했다.
그리고 방정환이 7살이 되던 1905년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작은아버지 였던 방흥수를 따라서 보성소학교에 가게되었는데 마침 신식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들여다보다가 그 때 학교장이었던 김중환 교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곳에 입학하려면 먼저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면서 용기를 내어 머리를 밀었고, 할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받게 되었지만 오히려 손자의 자초지종을 듣고 신식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함에 동시에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1907년 9살 때 집안 사업 실패로 인해 초가집으로 이사가게 되었고,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한순간에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동시에 잃게 되었고, 계모가 들어오게 되었으나 적응을 쉽게 못하였고, 오히려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식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들어와 기뻐하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하게 되고 그 이유는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1908년 10살의 나이로 소학생으로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게 되고, 거기서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을 활동했다고 한다.
1913년 관립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선린상업학교로 입학하게 되는데 2년만에 중퇴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방정환은 아동문학가가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오히려 조선은행 서기와 같은 금융 노동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가르쳤기 때문에 내면의 갈등을 심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하면서 서류 필사 업무를 했고, 사직 후에는 그 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인 류광렬과 함꼐 문학을 토론하며, 노동자들의 숙소에 머물기도 했다.
1918년 천도교 제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의 딸과 중매결혼을 했으며, 그 때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게 되었고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다행이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집안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919년 손병희를 도우며 3.1운동에 참가하면서 일본 제국 경찰들에게 발각된 후 고문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위험 인물로 분류되면서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도쿄로 유학을 가면서 도쿄연수영어학교에 입학해 소정의 과정를 수료하게 되고, 1920년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토요대학 철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거기서 마해송, 윤극영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였던 색동회를 조직하면서 활발한 어린이 교육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어린이를 위한 교육사업을 활동해나가면서 결국 1931년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졌고, 젊은 나이에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업적
1. 사랑의 선물
1921년에 도쿄 대학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면서 철학, 신문화, 아동문학, 아동심리학등을 공부하면서 중국으로 유학 기간이었던 때에 외국 동화들을 한국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유일한 단행본이었다.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자와 제비, 요술왕 아아, 한네레의 죽음, 어린 음악가, 잠자는 왕녀, 천당 가는 길, 마음의 꽃, 꽃속의 작은 이 등의 10편의 번역 동화를 출판하게 되었다.
방정환이 아 책을 만든 이유는 조선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일본에서는 이미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 발전해서 서점에 엄청 많았지만, 조선 어린이들은 그런 혜택을 못 받는다는게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2. 어린이 운동
방정환은 어린이들을 위해 도쿄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던 김기전과 함께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게 된다.
당시 소파가 노동절이던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개최한 이유는 당시 어린이들이 억압받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오랜 악습이었던 아동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억압하는 것과 해방하기 위해 개최했다고 한다. 만약 어린이 문학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린이 인권, 어린이들이 건강한 정서를 가지고 살도록 하려는 인권운동이므로
참고할만한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다.
3. 어린이 잡지 창간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을 주장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고, 그 때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민족의 미래, 희망을 살리기 위해 어린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강연을 마치고 1923년에는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다.
하지만 초반에는 큰 인기를 이끌지 못했지만, 방정환은 포기하지 않고 어린이의 내용에 학부모님들과 독자인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동화, 독자 응모 등을 실었으며 그의 창발성 덕에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공감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도 어린 시절에 월간 어린이를 읽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