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시민의 삶과 사후

by 삶은개발 2024. 4. 25.
반응형

소개

김시민은 1554년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 현재 기준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명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중훈대부 행사헌부 지평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지낸 아버지 김충갑과 어머니 창평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6남 2녀 중 셋째 아들이다. 김시민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가 8살 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어떻게 잡을 지 궁리하다가 고사에서 뱀은 활과 쑥대 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글귀를 통해 동네 아이들과 같이 손수 만든 활로 쏴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장성해서 몸집도 컸고, 도량이 넓었지만 힘이 강했던 것만 믿고 목소리만 크게 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의 성격은 자신의 건의가 무시당하거나 질타당하면는 오히려 분개하여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을 정도로 성격이 다혈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게 되면서 군기시에 입사하게 되었다. 1583년 회령 지방에서 여진족 니탕개가 소란을 일으키면서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게 되었고 거기서 토벌까지 완료하게 된다.
1591년 진주판관으로 승진하게 되면서 1년 후에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목사였던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목사가 죽으면서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서 그 직을 대리하였다고 한다.
진주로 돌아오면서 성민을 안심시키게 하고 피난하였던 성민들을 귀향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또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고 한다.
왜군들은 사천에 집결하고 진주로 진격함에 있어서 곤양군수 이광익과 상주판관 정기룡 등과 합세하게 되면서 적을 쫓아내고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는 일에 힘썼다.
그렇게 구원병 천명을 이끌고 가서 왜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하게 된다.
김시민은 취임하자마자 염초, 총통 등을 만들면서 부대를 배정시켜 숙달시키면서 성을 지키는데에 있어서 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한 편 대패한 일본군들은 진주성을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가 공격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김시민은 당황하지 않고 고을 안에 사는 백성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한 후에 여자는 모두 남장하라고 시켰고,
2만 대군을 이끌고 들어오던 일본군을 고작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조선에 있어서 위대한 승리로 남아있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한다.
하지만 1592년 마지막 결전을 끝낸 후에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은 그만 숨어있던 왜군의 총에 의해 쓰러졌고 결국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사후

김시민는 아이가 없어서 형 김시회의 아들인 김치를 양자로 들이게 되면서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고, 김득신이 바로 김시민의 손자라고 한다.
김시민은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고, 1702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그렇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얻게 된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 장군도 받은 시호인데 이에 대한 공통점을 보자면 패주하는 아군을 수습한 후 벌어지는 대전투에서 승리한 점, 승리가 코 앞인 상황에서 적의 탄환에 의해 사망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충민사에 배향되게 되었는데,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충민사가 없어지면서 진주성 내에 있던 창열사와 함께 배향되었다고 전해진다.
1619년 7월에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지었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를 진주전상각적비라고도 불리우며, 시도유형문화제 제2호인 촉성정충단비와 함꼐 나란히 서있다고 한다.
1987년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진주전상각적비 뒷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시민의 묘지는 처음에 충청북도 괴산군의 선산에 있었다가 추후에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 위기에 처해지는 바람에 1976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재이장되면서 함께 허물었었던 사당 충민사를 동시에 세웠다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