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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삶과 그 시대에 미쳤던 영향

by 삶은개발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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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일생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2년 17세의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를 했으나 떨어졌고, 그런 상심도 잠시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것을 보고 과거시험을 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893년에 동학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어 입도하게 되었고, 한 지방의 신도를 대표하는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안중근의 아버지였던 안태훈과 서로 돕기로 밀약을 맺었다.
1896년 대동강 하류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러다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고종 황제의 특명 덕분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중지 시킬 수 있게 되었다.
1898년 인천 감옥에서 탈옥하고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901년 김구의 아버지였던 김순영이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안악군의 양산학교 교원이 되면서
1909년에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한 후 학무총감이 되어 '한국사람이 일본을 배척하는 이유'를 주제로 강연을 하다가 체포당하였고, 동시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도 연루되면서 투옥하게 되었지만 풀려나게 되었다.
1919년에 3.1운동 이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취임되었다.
1931년에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였고,
1932년에 이봉창 의사가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3개월뒤에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고위급 장군 등이 즉사했다.
1940년에 김구는 한국광복군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임시정부 헌번 개정 후에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에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미군과 함께 비밀 훈련을 실시했고, 한국광복군의 참전 직전에 8월 15일에 광복을 했다.
1948년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3천만 동포에게 울면서 호소함'이란 성명문을 발표했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으나
1949년에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고 결국 세상을 떠났고, 그를 국민장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시신을 효창공원에 묻혔다.

김구의 책과 논문들

1.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김구가 자주독립에 일생을 헌신한 기록이므로 해방 후 1947년에 출간되었다. 상하 두 편으로 구성된 백범일지 중 상편은 김구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으로 취임되고 한동안 활동하던 때에 쓴 것이었고,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 형식의 유서였다. 항상 죽음과 가까이에 있는 위험한 일을 시작하며 자신의 지난 일을 알리려는 뜻에서 집필되었다. 하편은 1942년 충칭 임시정부 시절에 집필되었으며
이때 김구는 다수 독자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 백범일지의 일지란 일기가 아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기록했다는 의미이므로 다른 곳에서 볼수 없는 진귀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기록 유산으로 남아있다.

2. 나의 소원
백범일지를 펴내면서 뒤에 덧붙인 논문인 나의 소원은 우파 민족주의자인 김구의 정치 이념과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명문으로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김구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이루어냈지만 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을 이루지 못하였고, 친미파, 친소파 등이 활개를 치던 당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 글을 집필한 것으로 알고 있다.

3. 3천만 동포에게 울면서 호소함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울면서 호소함'이라는 제목을 주제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신념을 담아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해방 후 혼란한 정치 상황을 맞은 김구의 심정과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명문장으로 꼽힌다. 김구는 이 글을 발표한 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북한으로 남북한 연석회의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이루진 못하고 돌아간다.
김구의 측근들은 그가 남한 단독 선거를 참여하지 않을 경우 이승만과 한민당이 정권을 독차지할 우려가 있으니 선거에 참여하길 권유하고 호소했지만 김구는 끝까지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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