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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삶과 사후

by 삶은개발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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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광개토대왕은 391년 5월에 고구려 국내성 고이련의 잠저 즉 숨어지내던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374년 당시 국왕이었던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이었고 어머니는 어떤 분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시대의 제19대 태왕이었고, 본명은 담덕인데,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똑같이 대왕이라는 칭호로 많이 불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소수림왕의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 직위에 오르면서 그대로 광개토대왕을 386년 1월에 태자로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391년 5월 18살에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뒤를 이으면서 태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392년 7월에 광개토대왕은 석현성 등 10개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게 되면서 대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8월에 백제가 이에 반격해 오자 고구려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무마시키는 활약을 하게 된다. 그렇게 승기를 타게 되면서 10월에 다시 한번 백제를 공격하게 되는데 거기는 백제 북방의 천혜 요새이면서 중요지였던 관미성을 20일 만에 함락하게 된다. 이때 백제의 진사왕이 구원에서 사망하게 되고 아신왕이 즉위하게 된다.
393년 8월에 아신왕은 전무를 좌장으로 삼으면서 목책에 이르게 되었지만 단순히 치욕을 씻기 위한 도발이었기 때문에 회군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계속해서 공격하면서 393년엔 관미성, 394년엔 수곡성을 격퇴하고 함락했으며 394년에는 백제의 보복을 막기 위해 남쪽에 7개의 성을 건설하여 그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렇게 395년에 패수에서 백제군 8천명을 생포하면서 대승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지속해서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까지 포위하게 되면서 결국 백제의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게 되면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역사를 고구려 백제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렇게 백제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392년에 거란군과도 전쟁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이유는 378년 소수림왕 때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만 명 정도 되는 백성들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광개토대왕은 이를 목적으로 백성들을 되찾게 된다.
거기다가 395년에는 염수로 진출하면서 거란족 패려를 정벌하여 북속시키기도 했고, 수없이 많은 가축을 노획하며 성과를 얻었다.
그러다가 백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결국 왜군에게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은 고구려를 대적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제와 왜군들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보다못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광개토대왕은 이를 승낙하여 신라 쪽에 5만여명의 군사를 파견 보내게 된다. 그렇게 고구려군들이 왜군들을 쫒아가서 격퇴했는데, 왜군들이 가야 쪽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도 가야 쪽에 급격하게 세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가야는 망하고 대가야라고 이름을 다시 만들어 주도하게 되는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하면서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 등을 궤멸시키는 대승리를 이끌게 된다.
또, 모용씨의 후연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400년 2월에 후연 왕인 모용성은 고구려가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여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오히려 광개토대왕은 당황하지 않고,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게 되면서 402년에 오히려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고 함락시켰으며 결국 404년 후연을 정벌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연군도 똑같이 공격하면서 함락시키고, 후연은 멸망하면서 고구려계였던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면서 408년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서쪽 국경을 안정시키게 된다.
광개토대왕은 지역확장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힘썼는데 평양을 크게 중시하면서 9개의 절을 창건하게 되고, 왕이 직접 평양을 행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장수왕에게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을 써서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부터의 문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413년 10월에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후

광개토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즉위에 오르면서 먼저 한 일을 414년에 능비를 세우고 유언을 이행하면서 수묘인을 두면서 왕릉을 관리하게 명하였다.
그렇게 1880년에 발견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활약한 정복 사업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의 업적은 평생을 걸쳐서 64개의 성과 1400촌을 공취했다고 적혀있다.
그의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에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확실하진 않지만 집안시에 자리 잡고 있는 태왕릉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릉비 근처에 왕릉이라고 할만한 무덤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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